힘든 일이 생기면 어떤 이들은 “희생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이런 이들의 마음을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나의 비참함이 조금은 덜 해 질 것 같기에, 혹은 힘든 상황들로 인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조금은 줄어 들 것 같기에…
희생양 메커니즘도 있습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을 이야기했던 지라르는 역사 안에서도 폭력과 탐욕으로부터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메커니즘이라 주장하며,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는 엄연한 폭력입니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공동체가 갈등으로 인해 와해될 위기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람 안의 증오심(분노)를 힘없는 개인, 또는 다른 대상에게 쏟아 부어 긴장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정의 현실이 (공동체의 현실이)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그 공동체가 마치 하나가 되고, 가정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이는 엄연한 악마의 속임수와 같은 것, 아니 속임수였습니다.
희생양의 대부분은 무기력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이 그 자리를 차지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선한 이들이 늘 희생양이 되기도 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이러한 희생양으로 표현되는, 다른 면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보여지는 그 양은 우둔하기도 하고, 또한 무리 가운데 낄 수 없는 외톨이 양이었습니다. 그 양이 정말 우둔해서였을까요? 무리가운데 낄 수 없는 일명 왕따가 된 이들의 마음,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처를 지닌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왕따를 시킨, 희생양을 만든 그들의 잘못은 우월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민사상이라 이야기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의 시선입니다. 다른 한 측면에서는 시기와 질투의 내적인 힘이기도 하니다. 이러한 것을 인간의 욕망의 결과라 주장하는 신학자들도 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명 그 잘못을 교만이라 표현했고, 보나벤뚜라 성인은 시기와 질투라 표현했습니다. (* 타락한 천사는 교만의 죄를 지었다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주장을 교회는 받아들여 그 죄를 교만이라 합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 성인은 악마의 죄는 시기와 질투라 했습니다. 이 마음들이 바로 악마적 시선을 지니게 만든 악마의 시선이 아닐까요?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 다른 이들 보다 우위에 서고자 했던 마음을 상처로 볼 때는 욕망의 측면에서 보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악마의 사슬, 희생양 메커니즘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분명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욕망, 시기와 질투, 교만의 눈빛으로가 아닌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끌은 왜 그리 잘 보는지 안타까워하셨던 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희생양으로 더 이상 삼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 으로 당신이 직접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어두운 눈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지만, 더 큰 갈등을 피하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이라 합리화하고, 회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자신의 불안함과 두려움 등 인간적인 약함으로 인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외면하면서, 결국은 모든 이들이 만장일치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히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고, 고맙고, 미안할 뿐입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렇게 뿐이 할 수 없는 악의 사슬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례, 감사함입니다.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통해 악은 패배했고, 하느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이 승리를 통해 사랑하는, 이해하는,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을 키워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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