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녀를 보았습니다. 늙은 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딸의 모습은 보기 좋은 모습이라 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딸의 지극 정성에 대해 어머니는 고마워하기 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느끼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딸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직접적으로 아직은 어린아이 이고 싶다며 투정도 부리며 그 모습을 힘들어 하는 딸에게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다’며 이야기하는 모습은 경악할만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나이가 많아 지셔서 어린아이처럼 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평생을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왔을 것입니다. 자신을 불쌍하게 보이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을 위해 하는 말과 행동이 그러했습니다.
반대로 성장한 자녀들도 그러할 수도 있습니다. 20살이 넘은 자녀들이 사탕과 과자 만을 원하는 아이 마냥 말하고 행동하고, 그러한 내면의 움직임과 관계 안에서 살아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상처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자라면서 튼튼하여 지고 지혜가 충만해지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야 했지만 (루카 2장 40절) 받지 못했던 보호와 사랑, 지지와 신뢰의 부족으로 세상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불안함으로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미 성숙한 모습으로 여전히 어린아이 모습에 머물기를 선택하며 조금 더, 조금 더 시간을 요구하며 자신을 기만하고 누군가에게 기만 당하고, 기만하며 사탕과 과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바라봅시다. 나 중심적인 삶의 패턴, 대화들로 인해 누구가가 누군가를 이끌고, 누군가는 따라야 하는 곳이 우리 가정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때문에 의존적이 되기를 선택하고, 누군가는 그 의존성을 더 크게 만들기도 하며, 그것이 부모의, 자녀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 노모에게 하느님이 되어 줄 수 없고, 내가 내 자녀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받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상처들 때문에 가여운 영혼들을 돌보는 보호자가 되려 한다면 그 역시 기만하고 기만 당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기만이지만, 그 기만은 자신의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고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착이고, 욕심이고 멍에와 족쇄입니다.
요셉과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았고 하느님께 봉헌하셨습니다. 이 봉헌의 의미는 ‘내 몰라라’ 하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닌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 찔리는 것 (루카 2장 34-35절) 같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보호를 믿고 신뢰하여 그 모든 일들을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지켜보셨던 성모님의 모범을 따른 것입니다.
성 가정이란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성 가정을 본받는다는 것은 성 가정이 된다가 아니라 성 가정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부족하여 내 부모와 자녀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의존적이 되게 하거나 그것을 의무와 책임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 가정은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가정이라 하십니다.
성 가정 축일입니다. 우리 가정에 평화를 빕니다. 그 평화는 문제가 없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곳이며 생명의 보금자리입니다.
“우리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여기서는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 드리며, 우리 가정에 평화를 청합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그들의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한 해를 마무리 합니다.
상처로 인한 집착과 욕망에서 해방이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입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그 평화를 빕니다.